이직을 결심하며
오랜 고민 끝에 이직을 결심했다. 회사에 퇴사 의사와 퇴사일까지 이미 통보한 상태다.
이직을 고민한 건 1년쯤 됐지만, 막상 결심하고 나니 모든 게 빠르게 진행됐다.
사실 식스티헤르츠가 나쁜 회사는 아니었다. 처우도 좋았고, 일도 여유롭고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 이직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 이유를 스스로 찾고, 나 자신을 조금 더 알고 싶어서 이 글을 쓴다.
이직 원인 회고
SI
아마 이직 결정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일 것이다. 아쉽게도 현재 회사는 내가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SI와 용역 위주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시작했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처음 SI를 접했을 때는 거부감도 없었고 의욕도 넘쳤다. 어디선가 필요한 서비스를 대신 만들어주는 일이라 생각했고, 더 좋은 서비스를 위한 고민과 노력이 충분히 반영될 수 있다고 믿었다. 카카오페이지를 만들 때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지금은 그게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안다. 용역 프로젝트를 맡는 순간, 그 프로젝트의 가치는 시작 시점에 이미 정해진다. 무한한 잠재력을 품은 자체 서비스와는 출발점부터 다르다. 용역은 정해진 가치에 맞춰 최소한의 노력으로 일을 끝낼 때 회사에 이익이 된다. 프로젝트를 하나둘 거치면서 나도 여기에 적응했고, 점점 더 적은 노력으로 빠르게 구현하는 데만 몰두하게 됐다.
어느새 나는 탈출구를 찾고 있었다. 그게 아마 1년 전, 이직을 고민하기 시작한 시점이었던 것 같다. 1년간 자사 서비스를 만들 기회를 기다렸지만, 폐쇄적인 에너지 도메인에서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 사이 나는 점점 무뎌져 갔고, 어느 순간 이 회사에서 내 가성비가 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시 자체 서비스에 기여하며 내 가치를 만들어가고 싶다. 배포 한 번이 프로젝트의 끝이 아니라, 계속해서 살아 숨 쉬는 서비스를 만지고 싶다. 기획, UX, 성능 등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프로젝트—그런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AI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AI는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업무 영역에 깊고 빠르게 침투하고 있다. 개발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AI가 생산성을 끌어올리고 있다. 나 역시 OpenCode를 쓰면서 단순 코드 작성 시간이 최소 2배 이상 빨라졌음을 체감한다.
그런데 "생산성 향상"이라는 키워드는 스타트업에 너무 달콤했던 걸까. 어느새 회사에서는 모두가 AI만 외치고 있었다. 어떻게든 AI로 뭔가를 만들어내려 하고, 사람의 사고가 필요한 영역에서조차 AI를 들이밀고 있었다. 모든 초점이 AI를 활용한 속도에 맞춰지기 시작했다.
가장 큰 충격은 기획을 AI로 하는 모습이었다. AI가 기획을 뽑아내면, 사람은 거기에 맞춰 기능을 끼워 넣었다.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고민과 논쟁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람들이 점점 생각하기를 멈추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이것이 AI 시대에 적응하는 방식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수개월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정말로 생산성이 향상됐는가?"라는 질문에 선뜻 답하기 어렵다. 프로젝트 일정은 점점 밀리고, 결과물의 질은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AI가 정말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정답이었다면, 진작 프로젝트들이 끝나 있지 않았을까. 지금 내가 생각하기에 AI는 정답이 아니다. 정답은 언제나 결과에 있고, 옳은 결과만이 정답이다. AI는 결과로 가는 지름길이 될 수 있어도, 그 길 자체가 결과일 수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무분별한 AI 사용의 강요는 나를 점점 더 지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맺음말
이번 재직 경험과 회고로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게 됐다. 나는 사용자들에게 직접 가치를 전달하고, 그 가치를 계속해서 키워나가는 일을 할 때 가장 살아 있다고 느낀다. 앞으로는 그런 일에 내 시간을 쓰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도메인에서, 사용자들이 실제로 이득을 보는 서비스를 만드는 것—그게 지금 내가 그리는 방향이다.
AI와의 관계도 다시 정립해야 할 것 같다. 무조건적인 거부도, 맹목적인 수용도 아닌 어딘가. 생산성 향상은 결국 내가 더 깊이 고민할 여유를 만들어줄 테니까. FOMO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도구로서의 AI가 가진 진짜 쓸모를 찾아가 보려 한다.
돌이켜보면 식스티헤르츠에서의 시간이 마냥 아깝지는 않다. SI에 지쳐가면서도, 그 과정에서 내가 뭘 원하는 사람인지 알게 됐으니까. 때로는 원하지 않는 것을 경험해야 원하는 것이 선명해지는 법이다.
약 3년 만의 이직이다. 솔직히 두렵다. 잘할 수 있을까, 적응할 수 있을까, 이 선택이 맞는 걸까. 하지만 두려움보다 설렘이 조금 더 크다. 그리고 그 설렘이 있다는 것 자체가, 아마 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신호일 거라고 믿는다.